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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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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지마 사다오는 일본의 동양사학자로, 오카야마현 니미시 출신이다.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동방문화학원 연구원,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49년부터 도쿄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회경제사 연구를 시작으로, 이후 고대사 연구로 전환하여 동아시아 세계론(중화제국 책봉체제론)을 제창했으며, 야마타이 국 북규슈설에 기여했다. 니시지마는 중국사 시대 구분 논쟁에서 주요 논자 중 한 명으로, '니시지마 구설'과 '니시지마 신설'을 통해 한나라의 사회 구조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1998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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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사다오
기본 정보
본명니시지마 사다오 (西嶋 定生)
출생1919년 6월 25일
출생지일본 오카야마현 니이미시
사망1998년 7월 25일 (향년 79세)
국적일본
학력
출신 학교도쿄제국대학
학위문학박사 (1961년, 도쿄 대학)
경력
주요 활동 기관도쿄 대학
니가타 대학
슈지쓰여자대학
직함도쿄 대학 명예 교수 (1980년)
연구
연구 분야중국 고대사
주요 개념개별 인신적 지배
책봉 체제
동아시아 세계
주요 저서『中国古代帝国の形成と構造 二十等爵制の研究』 (중국 고대 제국의 형성과 구조 이십등작제 연구)
『中国古代国家と東アジア世界』 (중국 고대 국가와 동아시아 세계)
소속 학회

2. 생애

1949년 도쿄대 문학부 동양사학과 조교수가 되었고, 1957년 교수로 승진했다. 1980년 정년퇴직하였다. 처음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회경제사를 전공했지만, 이후 고대사로 관심을 옮겨 동아시아 세계론(중화제국 책봉체제론)을 제창하고 야마타이 국 북규슈설에 기여했다. 동방문화학원 연구원,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을 거쳤다.

2. 1. 출생과 성장

오카야마현 아테군 혼고촌(현 니이미시)에서 태어났다.[1] 제육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제육고등학교와 도쿄 제국대학 동급생이자 중앙아시아사 학자인 야마다 노부오와는 절친이었다.[2]

2. 2. 학문적 여정

1949년 도쿄대 문학부 동양사학과 조교수, 1967년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1년 「20등작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정년 퇴임하여 명예교수가 되었다. 니가타 대학과 슈지츠 여자대학에서도 교수를 지냈다. 처음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회경제사를 전공했지만 이후 고대사로 관심을 옮겨 동아시아 세계론(중화제국 책봉체제론)을 제창, 야마타이 국 북규슈설에 기여했다.

2. 3. 사망

1998년 7월 25일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3. 연구

니시지마 사다오는 1949년 도쿄 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조교수가 되었고, 1957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198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명나라청나라의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했다.[1] 이후 고대사로 관심을 돌려 동아시아 세계론(중화제국 책봉체제론)을 제창하고, 야마타이 국 북규슈설에 기여했다.[1]

니시지마는 초기 중국사 연구에서 한나라의 사회 구조와 황제 지배 체제에 대한 분석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를 노예제 국가로 규정하는 '니시지마 구설'을 발표했으나, 이후 비판을 수용하여 '개별 인신적 지배'론을 주장하는 '니시지마 신설'로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

3. 1. 중국사 시대 구분 논쟁

니시지마 사다오는 일본에서 중국사 시대 구분 논쟁의 주요 논자 중 한 명이었다. 이 논쟁에서는 경제 발전 단계설에 따른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4구분법을 사용했다. 주로 한대까지를 고대로, 위진남북조부터 , 까지를 중세로 하는 교토학파와 당대까지를 고대로, 송대부터를 중세로 하는 역사연파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 니시지마는 역사연파에 속했다.

니시지마는 1949년1950년에 발표한 논고('니시지마 구설')에서 고조의 휘하 집단에서 보이는 중견, 사인·졸·객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는 이들을 가내 노예적·의제 가족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고조 집단을 전투 집단이 아닌 생활 집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고조 집단의 모습은 당시 호족 일반에게 통용되는 것이며, 이러한 형태야말로 당시 사회 경제의 주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고, 한나라와 황제라는 관계 또한 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니시지마는 이를 노예제가 중국적인 전개를 한 것으로 보고, 한나라가 노예제 국가였다고 주장했다.[3][4][5]

이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증연룡부의 비판이었다. 증연은 니시지마의 고조 집단에 대한 이해는 옳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즉시 확장하여 노예제라는 이른바 외형적 접근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당사자들의 내부, 심리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진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춘추 시대 이전에는 집락()은 동일 씨족이 함께 생활하는 장소였고, 그 안에서의 성원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 이후에는 집락 밖으로, 그리고 밖에서 안으로의 이동이 격렬해졌다. 그 안에서 혈연이라는 유대감을 갖지 않은 사람들끼리 새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의 유대감으로 여겨진 것이 전국 사군 등에서 보이는 '은혜를 은혜로 갚는다'는 식의 협의 정신이다. 이 협의 정신은 당시 사회 밖에 존재했던 유협 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니시지마가 말한 가내 노예적 집단을 안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6][7]

또한 하마구치 시게쿠니는 당시 사회에서 호족은 생산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고, 생산의 주된 위치는 압도적 다수인 자작 소농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8]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니시지마는 구설을 철회하고, 황제와 소농민과의 관계성을 주안점으로 둔 새로운 논고('니시지마 신설')를 발표했다. 이것이 '개별 인신적 지배'론이다. 니시지마는 한나라의 이십등작제를 분석하여, 이 작제의 목적이 당시 붕괴되어 가던 종래의 민간 집락의 질서를 새로운 작제를 통해 보완함으로써, 집락의 질서 형성을 국가가 대신하고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의 인신에 대해 지배를 미치려 하는 데 있었다고 했다.[9]

증연은 니시지마 신설에 대해 '그 착안점의 비범함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하면서도, 니시지마 신설에서 황제·국가 측에서 일방적으로 민중에게 지배력을 미치는 형태는 결국 니시지마가 부정했던 동양적 전제주의·아시아적 정체론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고 하며, 니시지마의 논의를 '움직일 수 없는 구조론'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니시지마가 '개별 인신적 지배 밖의 존재'로 규정한 호족과 그 지배 아래 있는 백성이 형성하는 공동체야말로 개별 인신적 지배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10]

3. 2. 초기 연구: 노예제 국가론 (니시지마 구설)

니시지마는 1949년과 1950년에 발표한 논고('니시지마 구설')에서 고조 휘하 집단에서 보이는 중견, 사인·졸·객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이를 가내 노예적·의제 가족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고조 집단을 전투 집단이 아닌 생활 집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고조 집단의 모습은 당시 호족 일반에게 통용되는 것이며, 이러한 형태야말로 당시 사회 경제의 주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고, 한나라와 황제라는 관계 또한 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니시지마는 이를 노예제가 중국적인 전개를 한 것으로 보고, 한나라가 노예제 국가였다고 논했다.[3][4][5]

이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증연룡부에 의한 것이다. 증연은 니시지마의 고조 집단에 대한 이해는 옳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즉시 확장하여 노예제라는 이른바 외형적 접근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당사자들의 내부, 심리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진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춘추 시대 이전에는 집락()은 동일 씨족이 함께 생활하는 장소였고, 그 안에서의 성원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 이후에는 집락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의 이동이 격렬해졌다. 그 안에서 혈연이라는 유대감을 갖지 않은 사람들끼리 새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의 유대감으로 여겨진 것이 전국 사군 등에서 보이는 '은혜를 은혜로 갚는다'는 식의 협의 정신이다. 이 협의 정신은 당시 사회 밖에 존재했던 유협 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니시지마가 말한 가내 노예적 집단을 안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6][7]

또한 이에 더하여 하마구치 시게쿠니는 당시 사회에서 호족은 생산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고, 생산의 주된 위치는 압도적 다수인 자작 소농민이라는 지적을 했다.[8]

3. 3. 비판과 수정: 개별 인신적 지배론 (니시지마 신설)

니시지마는 1949년과 1950년에 발표한 논고('니시지마 구설')에서 고조 집단을 전투 집단이 아닌 생활 집단으로 보고, 한나라와 황제의 관계 또한 이러한 가내 노예적, 의제 가족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노예제가 중국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아 한나라를 노예제 국가로 규정했다.[3][4][5]

이에 대해 증연룡부는 니시지마의 고조 집단에 대한 이해는 옳지만, 이를 확장하여 노예제로 이해하는 것은 외형적인 접근이며, 당사자들의 내부, 심리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춘추 시대 이전의 집락()은 동일 씨족의 생활 장소였으나, 전국 시대 이후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 '은혜를 은혜로 갚는다'는 협의 정신이 유대감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이 협의 정신은 가내 노예적 집단을 안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6][7]

또한 하마구치 시게쿠니는 당시 사회에서 호족은 생산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고, 압도적 다수인 자작 소농민이 생산의 주된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8]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니시지마는 구설을 철회하고, 황제와 소농민과의 관계성을 주안점으로 둔 '개별 인신적 지배'론을 발표했다('니시지마 신설'). 그는 한나라의 이십등작제를 분석하여, 이 작제의 목적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의 인신에 대해 지배를 미치려 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했다.[9]

증연은 니시지마 신설에 대해 '착안점의 비범함에는 경의를 표한다'면서도, 황제·국가 측에서 일방적으로 민중에게 지배력을 미치는 형태는 동양적 전제주의·아시아적 정체론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니시지마의 논을 '움직일 수 없는 구조론'이라고 비판하며, 호족과 그 지배 아래 있는 백성이 형성하는 공동체야말로 개별 인신적 지배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10]

3. 4. 증연룡의 재비판

증연룡은 니시지마의 고조 집단에 대한 이해는 옳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즉시 확장하여 노예제라는 이른바 외형적 접근만으로 이해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당사자들의 내부, 심리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진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춘추 시대 이전의 집락()은 동일 씨족이 함께 생활하는 장소였고, 그 안에서의 성원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 이후에는 집락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의 이동이 격렬해졌다. 그 안에서 혈연이라는 유대감을 갖지 않은 사람들끼리 새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의 유대감으로 여겨진 것이 전국 사군 등에서 보이는 '은혜를 은혜로 갚는다'는 식의 협의 정신이다. 이 협의 정신은 당시 사회 밖에 존재했던 유협 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니시지마가 말한 가내 노예적 집단을 안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6][7]

증연은 니시지마 신설에 대해 '그 착안점의 비범함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하면서도, 니시지마 신설에서 황제·국가 측에서 일방적으로 민중에게 지배력을 미치는 형태는 결국 니시지마가 부정했던 동양적 전제주의·아시아적 정체론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고 하며, 니시지마의 논을 '움직일 수 없는 구조론'이라고 비판하고, 니시지마가 '개별 인신적 지배 밖의 존재'로 규정한 호족과 그 지배 아래 있는 백성이 형성하는 공동체야말로 개별 인신적 지배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10]

3. 5. 동아시아 세계론과 책봉 체제

니시지마 사다오는 동아시아 세계론(중화제국 책봉체제론)을 제창하고, 야마타이 국 북규슈설에 기여했다.[1] 초기에는 나라와 나라의 사회 경제사를 전공했지만, 이후 고대사로 전향하여 중화 제국의 책봉 체제론 및 동아시아 세계론을 주장했다.[1]

4. 저서


  • 『중국 고대 제국의 형성과 구조 - 이십등작제 연구』 (도쿄 대학 출판회, 1961년)
  • 『중국 경제사 연구』 (도쿄 대학 출판회, 1966년)
  • 『중국의 역사 2 - 진한 제국』 (고단샤, 1974년 / 고단샤 학술 문고, 1997년)
  • 『중국 고대의 사회와 경제』 (도쿄 대학 출판회, 1981년)
  • 『중국 고대 국가와 동아시아 세계』 (도쿄 대학 출판회, 1983년)
  • 『일본 역사의 국제 환경』 (도쿄 대학 출판회 〈UP선서〉, 1985년)
  • 『야마타이국과 왜국 - 고대 일본과 동아시아』 (요시카와 고분칸, 1994년)
  • 『중국사를 배운다는 것 - 저와 고대사』 (요시카와 고분칸, 1995년)
  • 『왜국의 출현 - 동아시아 세계 속의 일본』 (도쿄 대학 출판회, 1999년)
  • 『고대 동아시아 세계와 일본』 (이성시 편, 이와나미 현대 문고, 2000년)
  • 『니시지마 사다오 동아시아사 논집』 (전 5권, 이와나미 서점, 2002년)

5. 공저 및 편저


  • 스즈키 슌과 함께 쓴 『중국사 시대 구분』 (도쿄 대학 출판회, 1957년)
  • 『동양사 입문』 (유히카쿠, 1967년)
  • 『나라·헤이안의 도성과 장안: 한중 합동 심포지엄 고대 궁궐의 세계』 (쇼가쿠칸, 1983년)
  • 『공백의 4세기와 야마토 왕권: 야마타이국 이후 심포지엄』 (카도카와 선서, 1987년)
  • 『거대 고분과 가야 문화: "공백"의 4·5세기를 찾아서』 (카도카와 선서, 1992년)

6. 기념 논집


  • 산카와 출판사에서 1984년에 『동아시아사에서의 국가와 농민: 니시지마 사다오 박사 환력 기념 논집』(17명의 논고)을 출판하였다.
  • 산카와 출판사에서 2000년에 『동아시아사의 전개와 일본: 니시지마 사다오 박사 추도 논문집』(26명의 논고)을 출판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西嶋 定生 https://kotobank.jp/[...] 20世紀日本人名事典 2019-11-25
[2] 간행물 人と人
[3] 논문 中国古代帝国の一考察 : 漢の高祖とその功臣
[4] 논문 漢代の土地所有制 : 主に名田と占田について
[5] 논문 古代国家の権力構造 岩波書店
[6] 논문 漢代における民間秩序の構造と任侠的習俗 https://hdl.handle.n[...]
[7] 서적 中国古代の社会と国家 : 秦漢帝国成立過程の社会史的研究 弘文堂
[8] 논문 中国史上の古代社会問題に関する覚書
[9] 서적 中国古代帝国の形成と構造 : 二十等爵制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10] 논문 所謂東洋的専制主義と共同体 https://hdl.hand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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